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원제는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 >으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단편 소설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사회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충돌, 인간 내부의 선과 악이라는 양면의 공존을 다루고 있다. 저명하고 존경받는 나이 든 의사인 닥터 지킬 박사는 사회적 자아이자 인간의 선한 측면을 대변하고 흉측하고 섬뜩하나 젊고 본능에 충실한 하이드는 내면적 자아이자 인간의 악한 측면을 대변한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지만 그래서 더욱 읽을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한국 전래 동화, 성장해서도 오랜 기간 주로 한국 단편 소설에 심취하느라 세계문학이라는 큰 영향력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편이었다. (모순은 영화나 음악은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이쯤으로 늦게 읽은 변명은 그치고, 직접 읽고서 놀라게 된 점이 몇 가지 있다. 결국 이것들이 이 소설이 널리 고전이라 일컫어지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는 크나큰 이유가 될 것이다.
첫째 내용이 솔직하다. 창작 과정에서 보면 소설은 창조된 인물들에 의해 흘러가는 대로 구성되는 허구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이 어느 정도 스며드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솔직하게 쓰느냐의 물꼬를 잡고 흔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역량과 용기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는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쟁점이 아닐 수 없는 인간의 선악의 문제, 통제와 방임의 핵심을 에둘러가지 않고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물론, 하이드의 악행을 좀 더 적나라하게 그리고 더 많이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이드가 저지른 예화들로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 위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아이를 무참히 짓밟고 지나간다던가 덕망 높은 노인을 화풀이로 죽을 때까지 폭행한다던가의 악행과 동기 등은 요즘 관점에서도 분명 용서나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순전한 악의 소산이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자꾸만 그가 일일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넘어간 “치졸하고 부끄러운 다른 악행들”에 쏠렸다. 아마 소시민인 우리들이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로와질 때 남몰래 혼자 그리고 속마음으로 짓는 수많은 하찮고 더러운 짓거리들이 동시에 그런 것들이 아닐까. 아마 그것들을 좀 더 보여주었으면 우리들이 주인공의 입장과 딜레마에 더 많이 공감하고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작가는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대신 그의 흉측하고 기분 나쁜 외모와 분위기, 체형 등으로 생략된 부분을 대신한다. 그래도 그 심리 묘사, 즉 인간의 본성, 악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충동 등에 굴복하여 과학을 거침없이 이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 등은 매우 솔직하고 상세하여 부족함을 상당히 메워주고도 설득력이 있다.
둘째, 현대적이다. 뜻하지 않게 로버트는 약물의 영향 아래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몸이 허약했던 로버트는 지역 병원에서 환각제 LSD가 합성된 가능성이 높은 맥각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지킬 박사가 하이드를 불러오기 위해 제조해 먹었던 화학 약품, 거기에서의 변화 과정, 섭취 후 심리, 정신, 행동의 변화, 그리고 다시금 그 약품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모습 등은 환각제에 중독된 자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다.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오로지 상상력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좀 실망스럽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천재들로 인한 놀라운 아이디어, 발명, 혁신 등으로 믿고 있는 많은 부분은 실은 약물의 위험성과 의존성에 대해 잘 알려지기 전에 이를 복용하거나 중독, 남용한 소산인 경우가 적지 않다. 여기서 그들을 옹호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 당시 마약류에 대한 인식이 인류에게 부족했던 것을 어찌하겠는가. 전쟁 중에 군인들에게는 공포를 이기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심지어 주부들에게는 집안일에 활기와 날씬함을 준다고 마약을 배급하고 상품으로 팔았던 것을.
그러나 이 소설에서처럼,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 위해 지금 약물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다. 하이드와 지킬은 완전히 분리된 인격이며 동일한 힘을 가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하이드를 불러들일 수 있는 의지는 오로지 지킬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Robert Louis Stevenson은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생으로, 변호사가 되었지만 지병인 폐병을 줄곧 앓았으며 여행과 소설 쓰는 것을 더 즐겼다. 파리에서 11세 연상이었던 미국 여성 패니 오스본을 만나 결혼한다. (만날 당시 유부녀였으나 1년 후 이혼하고 재혼)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독일제국의 식민지 하에 있던 사모아 아피아에 정착했지만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현재 사모아인들의 성지에 묻혀있다.
널리 알려진 <보물섬>도 그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