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2(2016) >,앨버트 벨,오광만,생명의말씀사

[완다] 2022. 2. 19. 21:05

<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2 >
앨버트 벨 지음| 오광만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6년

이 책은 총 9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이다. 본래 총 10개의 Chapter로 구성된 한 권의 책이었으나 한 Chapter씩 나누고 매 시리즈마다 결론에 해당되는 10 Chapter를 동일하게 실어주었다.
2번째 Chapter는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당시의 문화와 유대교에 대해 다루었다. 지금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서로 간에 매우 배척하는 관계임에 틀림없지만, 예수님께는 분명히 유대인이셨고 당시 유대 땅에서 나시고 자라시고 설교하셨다.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즉 율법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하시지 않으셨고 문제 삼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바로 잡으려고 하신 것은 의식과 율법주의에 치우쳐 중심을 잃어가는 유대 백성들, 잃어버린 양 떼들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하심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유대교란 무엇인가?
당시 유대교는 오히려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욱 열린 의미를 가졌는데,
사두개파
바리새파와 서기관
헤롯당
열심당
에세네파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
그전에 유대교는 이미 팔레스타인 지방에 남아있던 유대인들과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을 때 지중해 각지인 바벨론, 애굽 등으로 끌려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인해 복합적인 모습이었다. 전자는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 땅의 예배 중심지가 있었지만, 후자는 헬라 문화와 언어에 좀 더 가까웠고 삶의 터전에 또 다른 성전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주전 3세기경 유대인의 성경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표준 성경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영향은 지대하였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유대인 역시 헬라 문화나 헬라 언어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히브리 성전으로 예배하고 아람어를 생활어로 하면서, 헬라어를 공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예수님이 나신 나사렛으로부터 도보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지역에 전형적인 헬라 도시가 있었음이 발굴되었다. 예수님 역시 헬라 문화에 대해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헬라어를 아셨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보다는 어쨌든 당시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는 깊숙이 침투해있었을 것이다.

2.
행실로써 예수님의 비판 대상이 되곤 했던 바리새파와 서기관들은 의미상 동등하다고 보는데, 이들은 당시 모세의 5경(토라)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등 엄격하고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자 대제사장들의 후예인 사두개파와 비교해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에 비견할 만큼 여러 선지자들의 책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상황에 변화에 따라 구전 해석을 매우 강조하였다. (ex. 탈무드) 그 배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래 종교적 유산인 율법을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이를 복사하는 사람들인 서기관들을 두었고, 점차 이들이 율법 해석자이자 학자로서 자리메김하게 된 바가 있었다. 로마 시대에도 이들은 전쟁과 투쟁을 치르면서 힘겹게 신앙을 지켜왔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고고하게 나타난 한 개인이 그것을 타파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3.
유대인들은 주후 66년부터 73년까지 로마에 대항하는 피의 혁명을 겪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18개 축복문을 낭송하는데, "나사렛 사람들과 이교도들이 한순간에 멸망되게 하옵시고, 그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책에서 지워 주옵소서."라고 한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살아남은 영적 지도자들은 야브네 회의를 거쳐 사두개파 바리새파 등과 같은 종파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여 회당 중심, 구약성경의 정경성 등 통합을 이루었다.


덧붙임.
이러한 그들일지라도 성경 말씀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의 회개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로마서 11장) 이 일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역사하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그들을 향한 구원 기도를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